열아홉 잔월효성
알페스가 사람 잡는다 본문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전날 야근에 찌들어 새벽에 퇴근하여 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난 그런 아침.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은 적당했고, 언제나처럼 제자리에 물건들이 놓여있어 동선에 방해되는 것 하나 없었다. 아침으로 커피를 내렸고, 베이글을 구웠다. 크림치즈에 블루베리, 꿀까지 올린 완벽한 식사를 끝마치고 정확히 17분 후, 외출할 준비를 끝마친다.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쓰리피스 정장. 아, 여기서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평소엔 정장과 동일한 색상의 무지 넥타를 하지만 오늘은 동생에게 선물로 받은 사선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했다. 딱히 심사숙고한 것은 아니다. 가장 위에 걸려있던 것을 골랐을 뿐이다. (애초에 보여줄 사람도 없다.)
출근길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주차장에서 시작해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묘하게 나를 의식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원래 타인의 옷차림이나 얼굴을 0.5초쯤 더 바라보는 날이 있다.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검찰청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작되었다. 4년 전 포드에 합류하여 현재는 제 비서를 겸하고 있는 개릿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인사한다. 주변을 한차례 힐끔이더니 고개를 숙이며 제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인다.
"오늘 실트 1위입니다, 라몬."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단 실트가 무엇인지 잠깐 까먹었기 때문이다. 몇 초의 로딩이 끝나면 겨우 그것이 실시간 트렌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엔 너무 많은 약어가 사람을 공격한다.
"무슨 주제로요?"
"주제라고 하기엔 애매할지도 모르겠으나, '랫라'입니다."
"……그게 뭔데요."
개릿은 대답을 대신하여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거기엔 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들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문제는 개릿이 그 옆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개릿에게 커피를 건네주는 장면이었다. 제 옷차림을 보아하니 이틀 전 아침이었다. 이 사진과 랫라라는 주제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애초에 랫라는 무엇이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틀 전 아침에 찍힌 사진 같네요. 이게 문제라도 됩니까?"
"네, 이틀 전 아침입니다. 라몬이 제 커피에 설탕을 넣어준 장면이죠."
"개릿은 설탕을 싫어하죠."
"그러니까요. 전 충격받은 표정이었고, 라몬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건… 명백한 오해입니다."
"?"
개릿을 뚫어져라 본다. 그 시선을 느낀 개릿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뒷일을 맡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뒷일이 너무 커졌을 뿐이죠."
"그걸 왜 태연하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진짜 이게 무슨 말이지. 아직 이해가 안 된 상태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탔고, 사무실이 있는 층수를 눌렸으며, 현재 우리는 사무실의 문 앞에 도착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여전히 탄식하는 상태의 개릿을 보고 나도 고개를 저었다. 자연스럽게 개릿이 사무실의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랫라는 개릿과 라몬의 이름을 따와서 만든 커플링입니다."
"개릿이면 릿 아닌가요?"
"서치 방지용으로 그렇게 지은 거예요. 개릿을 줄여서 랫. 애칭처럼요."
"개릿은 그걸 왜 잘 알고 있는 건데요."
"일단 들어보세요. 지금 랫라 팬카페 회원 수 4만 명 돌파했고요."
"팬카페요?"
"빌런 AU, 마피아 AU, 그리고 재판 중 고백하는 픽션이 지금 제일 인기입니다."
"AU는 뭡니까."
"Alternate Universe. 대체 세계관입니다. 지금 랫라는 현실에서 시작해 우주까지 확장 중이에요."
나는 순간적으로 커피를 뿜을뻔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옆 사무실에서 이상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가사가 조금 이상했다. 사랑은 법을 어긴 것 같아, 근데 난 네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 없어……. 인지부조화가 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빌런에게 당한 건가?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문득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오른다.
"이걸 베리가 보면 무슨 생각을 하려나요. …충격 먹어서 배우 생활에 지장이 가면 어떡하지."
"동생분은 벌써 보고 즐기고 계시던데요."
"예?"
"익명이긴 하지만 저는 보면 알죠. 제 유능함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1분 전에 댓글도 다셨어요. '라몬은 원래 사랑에 둔한 스타일이죠. 모쏠이니까. 힘내세요, 개릿 씨.'라고 다셨어요. 감사합니다."
"뭘 감사하는데요. 그건 또 무슨 암시인데."
이마를 짚고 이번엔 내가 탄식한다. 겨우 머릿속에서 상황이 정리되어 갈 때, 복도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스크롤을 내리는 개릿의 손이 빨라진 것으로 보아 분명 팬카페든 트위터든 뭔가 올라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편두통에 책상에 엎드린다.
"…개릿."
"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으십니까."
"오,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업무적으로 접근했을 뿐입니다. 단지… 이런 팬덤 문화에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을 뿐이죠."
"존경심은 무슨. 이런 얼어 죽을."
"그들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요. 공기의 떨림에서 문장을 짜내고, 스캔 한 컷으로 드라마를 완성합니다. 예술입니다."
"그럼 제 인생이 한편의 예술이라는 건가요."
"정확히는 팬 서비스의 재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검사의 언어는 정확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엔 그 어떤 법률 용어도 적용되지 않는다. 법적 의미의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윤리적으로는 대참사였다. 굳이 따져낸다면 이것은 상상에 의한 인격살인이다.
* * *
점심쯤, 나는 개릿과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정확히는 식사를 해야만 했다. 아침의 일도 있고 피하려고 시도는 했지만 그의 이능력도 이능력이고, 정각이 되자마자 사무실의 문이 열리는 동시에 앞에서 개릿이 샐러드 두 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미친 인간이. 아니, 속마음이 나와버렸다. 여기서 자리를 피하는 건 더 수상해 보일 것이다. 또한 복도를 오가며 열려있는 문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음흉한 눈빛의 사람들(이젠 동료라고 부르기도 싫다.)에게 소위 말하는 떡밥을 주는 것은 사양이다. 라몬은 지친 표정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그제야 문이 닫혔다.
"제가 계속 생각해 봤는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팬들에게 인사라도 하시죠."
"……."
"저랑 사진 한번 찍읍시다."
"벌써부터 혼란스러운데, 제 착각입니까?"
"그게 포인트입니다."
개릿은 윙크했다. 속이 쓰리다. 반박하려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포기한다.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기로 했다. 싸움은 서로 말이 통할 때 의미가 있다. 나는 조용히 샐러드를 먹었고, 개릿은 내 옆에서 샐러드를 먹는 둥 마는 둥, 망할 팬픽을 읽으며 웃고 있었다.
"이거 보세요. 여기선 우리가 법정에서 싸우다가 키스합니다. 피고인이 기절해요."
"기각."
"무엇을요?"
"내 정신 상태를 기각."
오늘따라 하루가 길다. 식사를 마친 후, 긴장감이 감돌던 오후. 근처에서 크리처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나갔다. 따라오려는 모두를 제지하고 오롯 류단과 령의 손을 각각 잡고 도망치듯. 중간에 령이 조금 당황한 듯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지금 인터넷에서 네 아빠와 아빠의 비서를 엮은 팬픽이 유행 중이고 아침부터 정신적인 타격을 입어 지금 멀리 떠나고 싶다고…….
여기서부터 패착이었던 것 같다. 휑하게 비어버린 사무실에 홀로 남아있던 개릿은 자신의 인스타에 점심때 찍은 사진을 업로드했다.
(뜨거운 커피에 혀를 데어서 얼굴과 귀 끝이 살짝 빨개져 있는 라몬이 샐러드를 먹고 있는 사진)
검사는 항상 냉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냉점함이란 때로는 숨기고 싶은
감정의 반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준비되었습니다^^🌹
#랫라실화 #공식 #권력관계 #사내연애금지
#농담일까요? #진실일지도 #오늘도 #함께 #야근합니다
……나중에서야 나는 그것을 보고 숨이 멎을 뻔했다. 그 아래에 붙은 해시태그를 보고는 결국 숨이 멎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왜 가장 무서운지 알 것 같은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필 이런 날만 외근에 칼퇴를 하는 포드에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사무실에 남아있는 사람은 저와 개릿뿐이다. 나는 또 커피를 내렸다.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묘하게 더 짙어진 것 같다. 미묘한 절망의 그림자가 져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릿은 태평하게 뒤에서 말을 걸었다.
"내일은 공개재판이니 승소하고 포옹 한번 할까요? 라몬?"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커피를 마셨다. 오늘 커피는 쓴맛이 강했다. 이상하게 현실과 닮아 있었다. 나는 오늘 이 기괴한 오해에서 무죄를 받지 못했다. 이것은 재판이 아니기에 내 승률이 떨어질 일 없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