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잔월효성
증인의 삶이 될지어다 본문
봄은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계절이었다. 겨울이 남기고 간 차가운 숨결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따스한 햇살에 서서히 녹아내리며 새싹이 돋고 꽃을 피웠다. 그런 봄날, 아직 스무 살이었던 미겔 Z. 당테스는 벤치에 앉아 졸업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하늘은 맑고 푸르며, 바람은 상쾌했다. 그곳에서 원하는 꿈을 이룬 페이지 도나티의 졸업을 축하해 주기 딱 좋은 날씨였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온 보상 같았다.
페이지 도나티는 미겔보다 4살 많은 소꿉친구이자, 가족과 같은 누이였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며 늘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활동적이고 호기심이 많던 페이지는 언제나 모험을 즐겨했고, 모험을 할 때마다 미겔을 데리고 다녔다. 재미없는 인생을 추구하는 미겔을 끌고 새로운 경험을 시켜주었고 그를 챙겼다.
처음 미겔은 그런 페이지가 귀찮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재미없는 인생을 계속해서 뒤집어났으니까. 하지만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미겔은 페이지를 믿고 의지했다. 그가 자신에게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고,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님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들의 관계는 굳어졌고,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그것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곧 다시 불어온 상쾌한 바람에 날아갔지만.
"미겔!"
이곳에서 익숙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단 한 명뿐이다. 페이지의 목소리다. 페이지는 졸업식이 끝난 후, 곧장 미겔이 기다리던 벤치로 달려온 것 같았다. 고르지 못한 숨, 흐트러진 머리카락, 구겨진 수녀복이 상황을 그려지게 한다. 교회에서 자주 보았던 수녀복이지만 오늘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쓸데없는 의문을 가진 채 벤치에서 일어난 미겔은 페이지와 나란히 섰다.
"축하해."
미겔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페이지를 반겼다. 조금 놀란 듯 미겔을 보던 페이지였으나 이내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꼭 껴안았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17살부터 시작해 24살이 된 지금에서야 졸업했지 않은가. 평소 페이지에게만큼은 너그러웠던 미겔이다. 밀어내는 대신 그의 등을 토닥여준다. 꽤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 도중에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페이지는 그의 품에서 떨어졌고, 반듯하게 접혀있는 종이를 꺼내 보였다. 페이지는 장난스럽게 웃는다.
"미겔, 이거 봐! 너랑 보려고 일부러 아직 안 봤어."
"…그게 뭔데?"
"새로이 받은 세례명이야."
뭘 것 같아? 글쎄. 좀 더 성의 있게 말해. 모르겠습니다. 아오…! 시답잖은 대화가 몇 번 이어졌다. 페이지는 잘 보라며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엔 ‘알렉사’라 적혀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 이름을 읊조렸다. 페이지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고, 미겔은… 평소와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진짜 수녀가 된 기분이야."
"맞잖아."
"아니지. 지금까지는 언제 받았는지도 모를 세례명만 있던 예비 수녀였지만 지금은 교황청에서 내려온 제대로 된 세례명이 있는 수녀님이시다."
"……."
우쭐거리며 주먹을 쥐는 페이지의 모습에 미겔은 고개를 저었다. 저게 어딜 봐서 수녀란 말인가. 굳이 수녀라 해야 한다면 수식어로 과격파가 붙어야 할 것 같다. 페이지, 그러니까… 이제 알렉사 수녀가 된 그는 미소를 짓는다.
"아쉽다. 미겔도 사제가 됐으면 비밀이 생기는 건데."
"세례명을 암호로 사용하지 말지."
"이래서 눈치가 빠른 녀석은…."
그의 말에 미겔은 깊숙이 던져뒀던 기억 중 하나를 끄집어냈다. 부모님이 가톨릭 신자였고, 미겔 또한 자연스럽게 모태 가톨릭으로서 살아왔다. 아기 때 이미 세례명도 받았지만… 교회에 갈 때를 제외하고 쓸 일이 없으니 자주 깜박했다. 지금도 대학에서 신학을 부전공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길을 갈 생각은 없었다. 그것을 페이지도 알고 있었기에 아쉬운 소리를 하기만 할 뿐 원하진 않았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가도 변하진 않잖아. 지금처럼 그래왔듯 앞으로도."
미겔은 무심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어."
페이지는 기뻐하며 대답했다.
참 극단적인 사람이다. 미겔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은 또 다른 약속을 했다. 7번째 약속이었다. 그날은 그들에게 특별한 시간이었고, 내일부터 시작될 완벽한 삶을 준비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 * *
2255년. 또다시 봄이 찾아왔다. 아니마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인근 마을의 복구를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구호활동을 했다. 바쁘게 물자를 배분하는 페이지와 그런 페이지 옆에서 물건을 나르고 있는 미겔은 이러한 상황이 익숙했다. 사람들은 슬퍼했지만 죽은 자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였다. 산자들은 계속 살아가야 한다. 하늘은 맑고 푸르며, 바람은 상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곳에 있던 그 누구도, 현재의 상황이 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미겔은 폐를 찢는 것 같은 답답함에 크게 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붉게 물든 시야를 털고 일어났다. 귓가에서 이명과 함께 곳곳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되었더라. 그래, 분명 점심 배식이 끝난 다음이었을 것이다. 저녁 배식의 식료품이 부족하여 건넛마을까지 운전하여 갔다 왔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 쪽에서 검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곳엔 사람들이 도망치며 살려달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며, 표범과 사자 그리고 이리와 같은 괴물이 도망가라 외치는 부모님을…….
"미, 미겔! 미겔!"
"페이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주변을 둘러본다. 마을의 경계에 있던 고목이 있던 자리다. 아니마에 의하여 완전히 부러져버린 고목의 아래에 생긴 굴에서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페이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미겔은 그쪽으로 달렸다. 살면서 그렇게 빠르게 달려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단차가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페이지의 얼굴을 감싸듯 잡았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눈치챈 페이지는 괜찮다며 미겔의 손을 감쌌다.
"나 좀 도와줘, 미겔. 자동차는 가져왔지?"
"그래."
"너도 봤겠지만, 마을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죽었어. …전부 죽은 건 아니야."
페이지는 자신의 뒤쪽을 고갯짓했다. 그렇다.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백여 명의 사람들이 열댓 명도 남지 않았다. 미겔은 잠시 하늘을 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의 맑고 푸른 하늘은 어디로 가고 탁하고 붉은 하늘이 마치 우리를 감시하듯 일렁이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미겔이 불안했는지 페이지는 그를 독촉했다. 아니마가 모습을 감춘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WAO를 기다려야 한다고. 어느새 굴에서 나온 페이지는 미겔과 나란히 서있다. 미겔은 고민했다. 충동에 휩싸였다. 이대로 페이지만 데리고 도망친다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것을 페이지가 원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사람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함께 움직였다.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동하려던 순간이었다. 대지가 울린다. 죽음에 가까운 소리를 흘리며 그것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몇몇의 사람들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것을 말릴 틈도 없이 아니마는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는 듯 그들을 쫓아가 난도질했다. 남은 사람들이라도 보호하려던 미겔과 페이지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주춤거리고 있던 그때였다. 아니마의 시선이 미겔에게 향했다. 확실하게 눈이 마주쳤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미겔은 강력한 힘에 의해 공중으로 날아갔고, 벽에 처박혔을 땐 이대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신의 뼈가 부러진 것 같은 고통이 올라왔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던데, 그걸 이렇게 제 몸으로 증명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언제나 미련할 정도로 착했던 페이지는 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미겔을 부축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함께 살아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벽에 처박혔다. 이번엔 페이지와 함께였다.
미겔의 코앞까지 다가온 아니마는 몇 번이고 냄새를 맡다가 뒤로 물러났다.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꺼내 들었다. 똑같이 난도질당해 죽겠구나. 이렇게 27년의 인생은 끝난다고, 페이지보다 먼저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생각하는 대로 이뤄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의 일이란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일수록 잘 일어난다.
페이지가 그 사이를 끼어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에 난도질당한 것은 미겔이 아닌 페이지였고, 페이지가 미겔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아니마는 미겔의 드러난 표정을 보고 크게 웃었다.
…미겔은 멍하니 자신의 품으로 쓰러진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미약한 숨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겔은 자신이 무슨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제 몫까지 살아달라던 페이지의 모습만을 기억했다. 자신이 선물했던 묵주를 쥐여준 채 죽음을 맞이하였고, 주마등처럼 기억이 떠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푸른빛을 내는 화염이 치솟았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처럼 흔들렸다. 구원도 파멸도 아닌, 그저 모든 것을 똑같이 만들어버리려는 것이다. 이곳은 지옥이다. 지옥처럼 변해버린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신 여호와가 이러한 마음이었을까? 신이 아니기에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온한 나날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젠가 너희는 전부 진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으리라.
그것은 그 최초의 소망이자 욕망이었으며 용서가 아닌 복수를 선택한 신도에게 내려지는 신의 저주였다. 신의 계시는 마음이 무너진 사람에게 내려온다고 했다. 어쩌면 그래야만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그는 오롯 자신으로서만 무너트릴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무엇도 그를 무너트리지 못하니, 비난하는 목소리도 저주의 억압도 진정한 죽음으로 이끌 수 없다. 이제 분노와 슬픔으로서 닳아 없어지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페이지를 품에 안은 채, 미겔은 화염 속에서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아니마를 응시한다. 제 몫까지 살아달라던 페이지를 위해서라도, 앞으로의 제 삶은 알렉사로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세례명은 제 삶이 이렇게 되리라 예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가 원했던 모든 것을 이루어줄 것이며 앞으로의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기억으로서 기록된 모든 것들의 염원이 이루는 형벌의 날이 곧 종말의 날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