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잔월효성
존재의 경계선 본문
세계가 무너졌을 때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세상의 끝을 목격하리라고는, 적어도 그날 아침 커피를 마시며 배당된 사건 자료를 훑어보는 순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한 번쯤은 해봤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사무적으로 그 장면을 바라봤다. 수없이 많은 건물이 순식간에 붕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두려움이나 경외감보다는 일정이 꼬이지 않기를 바랐다. 손에 쥐어진 서류만이 유일하게 현실감을 제공해 주었고, 도시의 고동이 멎고 사람들의 비명이 바람 속에 흩날려 사라질 때도, 나는 단절된 상태로 현재 사태에 적용될 조항을 무의식적으로 더듬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기이하게 여겼다.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포드를 제외하곤 대부분 그랬다. 어떤 이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기에 이 정도론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고, 또 몇몇은 내가 감정이 없다느니 윤리적인 비난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내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데 그 이상 말해봤자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나는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내 고유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었을 뿐이다. 그것을 설명할 수도 있었으나, 나는 그런 말조차 꺼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 자신도 내 감정의 존재 여부를 확신하지 못한 채, 조용히 유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감정이라는 것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것은 마치 수면 아래 흐르는 조류처럼 어렴풋하게 감지는 되지만 형태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나는 모방을 택하였다. 가족들 사이에서 오가는 즐거움과 슬픔, 웃음과 눈물을 관찰하고 따라 하며 습득했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외부의 구조로서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그런 습관은 점차 내 사고방식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결국에 모든 것들을… 심지어 인간관계마저도 일종의 논리적인 구성으로 환원해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언젠가 동생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냥 아무런 생각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즐기라고 했었다. 아마 이때부터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해지고 소위 말하는 뇌를 빼고 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 결과로 내가 선택한 것은 법이었다. 감정은 해석의 여지가 많고 모호한 반면, 법은 문장으로 정리되고 조문으로 구획되며, 상황이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조항에 따라 철자대로 처리하면 되었고, 그것은 나에게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옳음이라는 가치보다는 일관성이라는 시스템을 믿게 되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감정적 충동보다는, 명확한 절차와 근거에 따라 움직이는 체계가 더 신뢰할 수 있다는 생각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나는 검사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법은 단지 규칙을 관리하는 장치가 아니라, 필요할 때엔 국가가 허가한 폭력의 형식이라는 것을. 법은 양날의 검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칼자루를 쥔 검사의 손에 달려있다. 누군가를 기소하고 체포하며 때론 법정 밖에서조차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위치를 활용했고, 그것은 내게 죄책감이 아닌 통제력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그 안에 숨고, 그 안에서 휘둘렀다. 내 방식으로, 내 규칙대로.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의 일이다. 그날 밤 캘리포니아에선 비가 내렸다. 11월의 비는 대체로 사람의 마음을 축축하게 만든다. 아니, 보통 사람의 마음을 말이다. 범죄 현장은 오래된 여관이었다. 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아 수십 년간 방치되어 있던 건물이다. 외부는 허름했고 내부는 폐허에 가까웠다. 폴리스라인을 넘어 시신이 있는 방으로 가는 모든 공간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속된 말로 개판이지만 정돈된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보기 좋게 말이다. 나는 조용히 바닥에 앉아 시신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많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범죄자들의 말은 신뢰할 수 없지만, 죽은 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특히 내가 상대할 때는 더더욱. …앉아있던 몸을 일으킨다. 코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면서 삼단봉을 꺼내 들었다. 어둠 속을 노려본다.
"나오십시오."
"이런. 저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들려온 목소리는 중후했고 당황한 기색 하나 없다. 예상대로 누군가 현장 안에 있었다. 일반인이면 이미 도주했을 상황이었으나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규칙적인 구두 소리가 울리며 그림자가 점점 길어진다. 그림자 끝의 남자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검은색의 페도라를 벗으며 정중하게 인사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보다 큰 키의 50대 정도로 보이는 동양인. 페도라의 색과 같은 정장은 주름 하나 없이 말끔했고 오래됐지만 관리가 잘 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붉은색의 눈빛이 오묘했다. 장난기가 섞여 있는 모든 것을 통달한 사람의 눈이다.
"보통 이름을 먼저 말하진 않는데 말입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잇는다.
"이능력이 아닌 순수한 통찰력으로 제 존재를 간파한 사람은 오랜만인지라 흥미가 생겼지 뭡니까."
그의 이름은 개릿 에즈라. 꽤 유명한 인사였다. 사건 외엔 관심 없는 나조차도 알고 있는 괴짜 중의 괴짜이자 법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법자였다. 빌런이라고 칭하기엔 히어로에 가까웠고 히어로라고 칭하기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린 건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다. 굳이 이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개릿은 자신의 앞에서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마치 신뢰를 얻으려는듯한 행동엔 필시 그에 상응하는 목적이 있는 법이다. 주변을 한 차례 더 둘러본다.
"……현장 훼손은 불법입니다."
"훼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리만 조금 해드렸을 뿐이지요."
그런 거 싫어하시잖아요. 개릿은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며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이 마찰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어지럽게 깨져있던 유리 조각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다 한곳으로 모아졌고, 곧 녹아내리듯 하나로 합쳐지더니 소멸했다. 이능력자 중엔 모든 것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유는 다양했다. 편견, 통제, 혹은 그 자체가 무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개릿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이능력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보여주려고 했다. 어딘가 도발적이다. 나는 개릿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개릿은 나의 이능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담당하는 주가 아니라서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필요하시면 소개장과 비슷한 이능력을 지닌 포스를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반드시 당신이어야 합니다."
개릿은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는 법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믿습니다. 그러한 이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도구로만 취급하고 있으며, 감정이 없기에 우선순위가 다릅니다. 진실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존재라고 확신이 듭니다. 그러니 라몬, 반드시 당신이어야 합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침묵했다. 내 감정은 없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말을 꺼내지 않는다.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말을 꺼내는 수고는 법정에서나 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어디까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일까. 개릿은 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피우진 않았다. 그냥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며, 나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다시 말을 이어간다.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인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살릴 수도 있었는데, 늦어버렸죠."
"죄책감을 느끼십니까."
"아니요. 그저… 불편합니다. 제가 구하지 못한 건, 제 잘못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싫습니다."
이 남자는 묘하게 솔직했다. 나는 거짓 속에서 살아왔고, 진실을 찾아내는데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이능력을 포함한 자신감이다.) 그렇다고 그의 제안을 수락하기엔 리스크가 컸다. 숨기지 않는 자는 의외로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빠르게 천칭이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현재 소속 없이 용병처럼 떠돌아다니는 개릿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리스크가 그리 큰 것도 아니었다. 아공간(亞空間)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이능력은 희귀하다. 마침 자신의 팀에 필요한 이능력이다. 나는 그에게 팀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 말은 마치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건조하게 나왔다. 놀리는 것이라 느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이 남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비정형적인 수사, 예측할 수 없는 판단력, 그리고 균형을 깨트릴만한 기질. 그런 것이 지금 이 팀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개릿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한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그 어떤 소리도 쉬이 울리지 않는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건 수지타산이 안 맞습니다."
"개인과 개인의 약속이나 거래로 취급될 수 있으나 시선에 따라 편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편법은 범죄로 분류됩니다. 범죄는 예외적이지 않으며, 당신은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릿은 웃었다. 어이없다는 듯, 동시에 흥미롭다는 듯. 많은 것이 생략되었으나 그는 알아들었다. 요컨대 편법이 되지 않으려면 합법적인 방식으로 수사권을 따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사에 참여하려면 자신의 팀원이 되어야 한다.
"세간에선 저를 괴짜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라몬, 당신은 저보다 더 괴짜인 것 같습니다. 이상한 사람이군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데 신뢰가 갑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왔다.
"좋습니다. 사흘만 시간을 주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자신의 예상은 적중할 것이다.
바로 이렇게.
정확히 사흘 후, 캘리포니아주 연방 검찰청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그 손님은 곧 포드가 되었다. 양아치, 이단아, 문제아, 마피아….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가 붙는 포드와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모습에 사람들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 그 생각을 접게 되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조금 부끄럽지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자신이 직접 스카우트한 녀석들을 이미 세 차례나 보았는데 네 차례라고 또 다르겠는가. 자연스럽게 팀에 녹아든 개릿은 어느새 모두에게 실장으로 불렸다. 그는 여전히 법을 믿지 않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도 법은 닿는다. 어쩌면, 그런 사람일수록 더 가까이에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판별해 줄 사람이 말이다.
* * *
사람들은 무너지고 있는 세계에 적응했다. 비일상이 일상이 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은 끝났고, 보고서는 남았고, 형광등은 조용히 깜박이고 있다. 도시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와중에도 나는 변함없이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서류를 처리한다. 말이 되지 않는 진술을 법이라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진실은 종종 너무 단순해서 거짓보다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조각으로 나눠 분해하고 분석하고, 필요하면 조용히 압박을 가했다. 물론 합법적인 선에서. 투둑, 툭. 쏴아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몇 분 뒤 묘하게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개릿은 문도 두드리지 않고 제 사무실로 들어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꽤 웃겼다. 만년필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는 소리만이 사무실에 울린다. 허공에 여운이 남는다.
개릿은 자신의 어깨너머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을 잠시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라몬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네, 기억합니다."
"그때 제가 했던 말도 기억하십니까? 정확히는 헤어지기 직전에 했던 말입니다."
"아마도, 제게 참 웃기다고 하셨지요. 다들 법을 무시해서 히어로가 되었는데 저는 법을 지켜서 외로워 보인다고 했을 겁니다."
"그리고 법은 가장 이상한 언어라고 제가 그랬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금은 흐릿해졌으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오랜 시간 머릿속에 남았던 것 같다. 법이라는 구조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 그것만이 나를 나로 구성해 준다는 사실. 나는 그걸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알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구조를 끝없이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유일하게 신뢰하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모방 아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쯤은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거나 비난할 수도 있었음에도 개릿은 그러지 않았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고, 내가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한때는 그것이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어떤 말도 없이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건 동정이 아니라 연민이고, 연민은 결국 내 안의 균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라몬은 법을 지키려다가 결국 혼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법을 버리고도 외로웠고요. 포드의 모두는 각자의 정의를 관철한 사람들이었으며 고독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현재에 모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문장을 품고 있었던 사람처럼, 조용하고 단단하게.
…어쩌면 우리는 같은 언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배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법을 통해 감정을 배웠고, 그는 감정을 통해 법을 시험하려고 했다. 평행선을 이어가던 우리들은 그러다 어디선가 마주쳤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마치 비 오는 오후의 끈적한 공기처럼, 어딘가 묘하게 어긋나 있었고, 동시에 지나치게 가까웠다. 우린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았고, 서로를 이해했으며, 동시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여 살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언어로 말하고 있다. 법이라는 구조, 질서라는 언어 속에서. 그 언어가 나를 만든 것이고, 나는 그 언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러할 것이다. 누군가를 먼저 구하려 하지 않는다. 구하는 일에는 감정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판단하고, 기록한다. 슬픔 앞에서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아직도 망설인다. 그 망설임은 내가 감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감정을 다룰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간다. 그렇게라도 살아간다. 마치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방식인 것처럼.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나는 계속 쓰러져도 일어나 또다시 법의 이름으로 걸어 나가게 될 것이다. 그곳이 피로 물든 거리든, 공허한 법정이든 상관없다.
나는 법인가, 사람인가.
아마도 나는 그 둘의 경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위치다. 나는 감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동정하지는 않는다. 이해와 동정은 닮았지만 다르고, 나는 그 차이를 알고 있다. 나는 법의 일부다. 사람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확실히 사람은 아닌 것이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해할 수 있고, 동정하지 않으며, 감정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형태를 겨우 유지시켜 주는 마지막 구조물이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드물게, 그 구조물 안에서도 틈이 생긴다. 작은 균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어느 날 오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누군가의 침묵 속에서, 또는 지나가듯 부딪친 한 문장에서. 그 틈 사이로 무언가가 흘러들어온다. 말하자면, 감정 같은 것. 정의 내릴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그래서 더 위험한 것들.
"라몬, 당신이 법의 테두리 안에 자신을 묶어두려는 건 알지만 가끔은……, 아니, 당신을 알아갈수록 당신이 누구보다도 사람이고 싶어 한다고 느껴집니다."
개릿의 말은 정확히 옳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부정하지 않았다는 건, 곧 인정이라는 걸 그도 알았을 것이다. 나는 법을 따라 걷는다. 그것이 익숙해서, 그리고 유일하게 나를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끔은 의문이 생긴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정말로 정의로 가는 길인지, 아니면 그저 버려지지 않기 위한 습관 같은 건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도 곧 잠잠해진다. 의문은 감정을 동반하고, 감정은 결국 나를 흔들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 쪽을 택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다.
"안 그래도 비가 와서 우중충한데 사무실 분위기가 더 우중충해졌습니다. 내일 일정 알려드릴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오전 10시부터 15시까지 재판이 다 잡혀있으십니다. 그중 15시에 진행되는 재판은 에레보스인 크레센트의 재판이고요. 기자들이 어떻게든 발을 넣고 싶어서 안달 났습니다. 기자회견 이후 상담 7건 잡혀있으시네요. 끝나는 시간은 미정."
"…내일도 퇴근 못하겠죠."
"은퇴하시는 게 빠를 겁니다."
"그리고요?"
"시차 문제로 이곳 기준 오후 10시에 한국과 협력 관련 미팅 있으십니다. 한 달 전에 서울에서 발생한 건물 붕괴로 천 단위 사상자가 나온 사건이고, 어디 보자… 특정된 범인의 이름은 박하연이네요. 올해로 29살. 여성."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릴수록 부지런하군요."
"젊으니까요."
시답잖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저 또 하나의 사건, 또 하나의 피의자. 나는 그렇게 분류하려 했다. 감정 없이, 판단과 기록의 틀 안에서. 하지만 어느새 개릿이 올려둔 서류에 시선을 옮긴 채 규칙적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개릿은 아무 말 없이 내 손끝을 보고 있었고, 나는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서류를 넘겼다.
"마음에 걸리십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무적인 어조였지만, 말의 끝에는 작게 가라앉은 걱정이 스며있다.
"아니요. 머리카락이 붉어서 잠시 봤습니다. 개릿, 우리가 기록하는 건 죄지만 그 죄를 짓는 건 결국 사람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고, 사무실엔 정적이 흘렀다. 커피가 식고 있었고, 창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얇고 끈질기게, 마치 멈출 이유를 잃어버린 것처럼 계속 내린다.
"확인해야 할 것이 생겼습니다."
몸을 일으키면 의자가 삐걱이는 소리를 낸다. 개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더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는 결국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 침묵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스탠드 행거에 걸어둔 코트를 집어 들었다. 아직 내일이 오지 않았지만, 이미 내일의 무게는 어깨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무게 속에서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더 선명해질 뿐이다.
"어찌 됐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아공간을 열던 개릿은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실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죄의 무게가 크든 작든, 그 중심엔 결국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것. 우리는 그걸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판단하고, 때로는 외면합니다. 슬픔을 견디는 방식이 모두 다르듯이, 정의를 지키는 방식도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듯이요."
아주 오랜 시간, 나조차도 정확히 말로 붙잡을 수 없던 그 무언가. 진실을 밝히는 일. 사람을 마주하는 일. 이 둘은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진실은 때로 사람을 침묵하게 만들고, 사람은 종종 진실을 부정한다. 그 사이에서 나는 균형을 잡으려 애쓴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균형을 지키려 할수록 점점 더 나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마치 법이라는 단단한 껍질이 점점 나를 텅 비게 만들고, 나는 그 텅 빈 형상을 간신히 유지한 채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아마 그것뿐일 것이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계속 바라보는 일. 그것이 법을 따르는 일이든, 사람을 이해하려는 몸짓이든, 결국은 스스로를 놓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개릿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침묵이 오히려 위로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말했다. 마치 스스로에게 들려주듯이.
"이번에도 우리의 정의가 옳다는 것을 보여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