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잔월효성
길 위의 히어로 본문
주원복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하루하고 몇 시간 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능력자가 아닌 이상 아무리 힘을 쏟아도, 아무리 싸워도 막을 수 없었다. 바이러스는 무차별적으로 퍼졌고, 히어로들이라고 해서 그 사태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주원복은 더 이상 히어로가 아니었다.
히어로들의 계약은 끝났고 이제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장장 20년이다. 20년이나 걸렸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주원복은 제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본부에 남아있기로 했다. 그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남아있기로 한 것은 정이 붙은 것도 있지만 길을 잃은 아이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에서 아무리 소중한 것을 쥐고 있어도, 그것은 이미 불완전한 것일 뿐이었다. 그 불완전한 것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아이들은 쉽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주원복은 히어로의 정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기득권층의 모든 것을 누렸다. 원하는 것들은 말 한마디에 손아귀에 들어왔고 분수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들은 권력으로 짓밟는 등의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본인만 잘하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영원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었고, 철옹성도 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하면 그것이 약점이 되어 무너지기 마련이다. 주원복이 삶의 방식을 바꾼 건 그때부터였다.
타인에게 선을 긋는 주제에 도움을 요청하는 손을 거절하지 못하고, 누구보다 먼저 이탈할 것 같지만 끝까지 남아 마지막을 지켜본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뒤에서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지원한다. 그렇게 살아가길 익숙해졌는데 또다시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다. 정부와 수많은 산하 기관들은 하루아침에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명령을 내릴 사람도 없다. 백신도, 구조요청도 없었다.
다만, 그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싸움만이 계속될 것이다.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에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는 화면에 뜬 이름을 잠시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연결이 되었음에도 정적이 흐른다. 주원복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수화기 넘어의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수십 초의 정적 끝에 익숙한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 ……어머니.
"그래."
- 쌍둥이는 내일 오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어제 바로 이동하셨고, 저는 일주일 정도 서울에 남아있을 거예요.
"고생했네."
- 예천엔 언제쯤 가십니까.
"오늘 중으로 갈 거야. 새벽에 처리할게 좀 많았어서…."
간단명료한 대화가 이어진다. 주원복은 제 유니폼 안주머니를 더듬거리다 말았다. 수년이 지났음에도 흡연자 시절의 습관이 버릇이 남아있다. …그는 남은 삶의 방식을, 혹은 이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의 삶의 방식은 가족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의절했던 아이들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주원복에겐 아버지 되는 사람이 먼저 연락을 하였다. 휴가철마다 갔던 집안 소유의 섬에서 모이자고. 원래라면 거절했겠지만 아이들의 안전이 달린 문제였고, 자신의 이능력만 잘 사용하면 평생 그곳에서 살아도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동탄에 있는 히어로 본부가 빌려준 창고의 물건 중 쓸만한 것들을 전부 예천에 있는 집안이 소유한 창고로 옮겼다. (도둑질은 아니고, 개처럼 구른 것에 대한 보상과 퇴직금 대신이다.) 새벽엔 예천으로 가서 그 창고를 새로운 허브로 지정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히어로 본부에 남기는 것은 없다. 휴대폰을 꺼버리는 것만으로도 이곳에서의 모든 관계가 정리되고 인연은 끊긴다. 20년 전 주원복이라면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오자마자 모든 것을 끝내고 사라졌을 것이나, 20년 후인 현재의 주원복은 그러지 않았다. 어찌 됐든 무너질 뻔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히어로 본부였다. 그에 대한 마지막 빚을 갚는 것이라 스스로에게 변명한다.
새벽에 처리했던 일에 관련된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이어지고 전화는 끊긴다. 주원복은 아무 말 없이 전화가 끊겼다는 문구를 본다. 액정이 검게 변한 후에야 그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바람이 분다. 이번엔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아니라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시끄러운 방향을 바라본다.
세계가 무너져도 살아갈 사람은 살아간다. 그것이 어떤 방향일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시끄럽더라도 곧 고요해질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마지막엔 이능력자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재 세계의 상태는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혼란이 깔려있다. 주원복은 그에 대해서 말을 먼저 꺼내진 않을 것이다. 걱정도 하지 않을 것이고,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기에 그곳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앞서 말하지 못했던 말을 잇자면… 히어로가 아닌 주원복은 평범한 사람이자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자식이다. 히어로가 아니기에 더 이상 누군가를 도울 필요가 없다. 그날, 고주용의 목이 날아간 채 집안에서 파리와 함께 나뒹구는 모습과 붉게 물드는 거리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았음에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한 일이 있었음에도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절망 속에 빠져 있었고, 주원복은 그 상황이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이 세상은 죽은 자들이 가득한, 그저 시간이 흐르며 사라져 가는 끝없는 어둠 속에 있었으므로.
그렇다고 해서 주원복은 누군가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참으로 모순적이다. 고립된 세계에서 그는 그저 살아남을 방법만을 고민했다. 오늘따라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주원복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원체 무뚝뚝한 성격으로 살갑지 못함에도 언제나 자신을 좋아해 주는 아이들. 입사 후 저도 모르는 사이 옆을 내어주게 되어버린 사람들. 바보 같은 소리 나 해댔던 본부와 지부의 얼굴 흐릿한 녀석들과 인생에 도움이 안 됐던 전 남편은 넘어가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곧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일어섰다.
주원복은 결국 구차한 변명과 함께 불완전함을 위하여 싸우기로 하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끝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걸어나가는 것이다. 물론 잃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스스로를 히어로라 칭하지 않을 때라고 본다. 향하는 길은 황폐했지만 온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