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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동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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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동행

새벽녘 파랑 2024. 2. 2. 19:36
추천 BGM // King Gnu - SPECIALZ

 

 

 

C 대륙에 있는 베게로세 연합국은 한겨울에도 봄과 초여름의 경계에 있었다. 으레 그렇듯 누군가는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아 불만을 토로했으나, 현재 이곳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베게로세 연합국의 날씨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자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곳곳에 사람의 손이 닿았던 흔적이 남아있으나 오랜 시간 관리가 되지 않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형태는 꽤 볼만했다. 결국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모순적인 생각을 하며 그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수풀을 지팡이로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몇 년만 빨리 왔어도 길이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희미한 달빛 한 줌조차 허락하지 않는 숲의 밤은 어지러웠다. 아주 작은 소리도 메아리가 되어 크게 울렸고, 이는 두려움의 파도가 되어 이성을 잡아먹는다. 그렇게 어둠에 잠식되어 방향감각을 잃게 할 것이다. 하지만 한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그에겐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기꺼우면 기꺼웠다. 꼭 제가 있어야 하는 곳에 돌아온 듯이…….

 

가까이에 있는 고목에 손을 올리는 순간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휘청이다 고목의 뒤로 몸을 숨겼다. 얼마나 강했던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이 영화에서나 볼법하게 흩날리듯 떨어졌다. 그것은 숲에 출입을 허락받지 않은 자를 향한 경고이자 축객령이다. 혹은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강수(強手)일지도 모른다. 끼기긱, 끼긱, 끼이이익. 손톱을 세워 칠판을 긁는 불쾌한 소리가 귓가에 연신 울린다. 그는 작게 욕지거리하며 소리를 무시한다. 계속 나아가는 대신 반대편의 무너져 길을 막고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넘어간다. 그러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이 나온다.

 

이곳도 그랬다. 자연과 하나가 되었으나,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오히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수준이다. 탁, 탁, 탁….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린다. 그의 예상대로 흙으로 이뤄진 땅이 아니다. "제대로 왔군."이라며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지의 공간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마치 이곳을 잘 아는 사람처럼,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발걸음은 거침없었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깨진 유리조각 같은 단편적인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는 이곳이 용의 유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에야 용은 전설 속의 동물, 혹은 마수로 취급이 되지만 과거엔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 중 하나였고, 그의 고향에도 새하얀 비늘을 지닌 용이 살고 있었다. 비록 그 용이 악용(惡龍)이라고 해도 말이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스러질 것 같은 기둥이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얼핏 보면 바위 같은 그것엔 하늘을 나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는 이끼가 가득했고 이름 모를 덩굴이 감겨있다.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받아들여 제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시금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린다. 박자에 맞춰 소리가 공허 속에서 울렸다. 그는 장님이었으나 소리로 모든 것을 파악할 줄 알았다. 아주 미세한 소리조차 그 앞에서는 중요한 정보가 되었고, 선뜻 발을 디딜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그에게… 그러니까, 뮤직 헌터(정확히는 작곡 헌터다.)인 알다르에게 이 유적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남자는 베게로세 연합국의 높으신 분이었다. 어느 날부터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이 숲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고통을 호소한다고 했다. 해결을 위해 파견한 이들도 똑같은 증세를 겪었다. 그렇게 여섯 번째 파견에서 겨우 이 유적에 진입하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딱 그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주변에 널린 것은 유적의 잔해와 그 잔해를 덮은 자연의 경이로움뿐이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부른 것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평소의 행실 문제로 처음엔 반신반의하며 그를 미심쩍게 보았다. 몇몇은 사기꾼에게 걸린 게 아니냐는 말도 했다더라. 그러든 말든 그는 사람들이 앓고 있던 알 수 없는 병을 고쳐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알다르를 신뢰하기 시작하였다. 해결만 해주면 뭐든지 해주겠다는 높으신 분의 말은 사실이었고, 덕에 그는 혼자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쭉 살폈다. 장님이면서 보이는 척이라도 하는 것인가 싶은 행동이다.

 

그들은 보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기에 볼 수 있었다.

 

지팡이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린다. 그러면 지팡이의 손잡이가 막대와 분리되며 검이 된다. 나무뿌리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한곳으로 걸어가 검을 박아 넣는다. 손에 힘을 주어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나무뿌리는 자아를 가진 듯 양옆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축축하고 비릿한 흙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유적의 입구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는 그저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 것이다. 흡사 기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날 알다르는 유적에 진입하지 않았다. 대신 저 멀리 요르비안 대륙에 편지를 보내, 자신을 도와줄 헌터를 구했다.

 

 

 

* * *

 

 

 

하필 그날은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축제가 한창인 도시의 밤은 어지럽고 찬란했고, 그와 대비되는 새까만 밤하늘엔 보름달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따금 유성우가 내리며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거리를 뒤덮는다. 알다르는 그곳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늘진 골목의 한편에 쌓인 나무상자 위에 앉아있었다. 술을 마시며 무료하게 시간을 죽인다. 그렇게 몇 병을 비웠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광장에 있는 첨탑에서 정각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열한 번의 종이 울렸기에, 약속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정말 귀신같이 한 사람분의 발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묵직한 것을 들고 있는지 한쪽으로 무게중심이 약간 쏠려있다. 자신을 발견한 것인지 시선이 느껴졌다. 잠깐의 침묵과 함께 "알다르 씨?"라고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알다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술병에 남은 술을 비워낸다.

 

"요크신 시티에서 온다는 헌터가 너였어?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나."

 

"그러게 말입니다. 의뢰하신 내용에 따르면……,"

 

"에헤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런 이야기 할 거야?"

 

"공적으로 만난 것인데도요."

 

"아직 1시간 남았잖아."

 

"56분 남았습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어요."

 

아니, 오히려 옛날보다 더해지지 않았나? 영양가 없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입 밖으로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거진 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의 기억 속의 모습과 크게 변하진 않은 것 같았다. 나무상자에서 내려온 그는 또 다른 헌터, 치우 신야에게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도심을 벗어난다. 눈부신 간판이 점차 사라진다. 두 사람을 비추던 극채색의 시간은 빛이 바래간다.

 

"치우, 비스트 헌터니까 마수를 상대하는데 자신 있지? 마수가 아닌 것은?"

 

"마수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네. 문제는 없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켜줄 수는?"

 

"저는 그 의뢰를 수행하러 왔습니다, 알다르 씨."

 

치우는 듬직하구나. 감사합니다. 이후에도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그 사이를 비집고 정적이 흐르기도 했지만 불편하다기보단… 그래, 잔잔한 바다를 하염없이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눈앞에 나타난 숲에 의한 감상일 수도 있었다. 며칠 만에 돌아온 숲의 입구는 폭풍전야와 같은 기묘한 일렁임이 존재했다. 영겁의 시간 속에 갇힐 것만 같은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헌터인 두 사람에겐 삶의 일부와 같은 것이었으니,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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