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자의 회고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는 말이 있다. 넓은 황야를 가로지르는 국도 너머의 산림은 누구의 소유인지는 모르나 철조망이나 안내판 하나 없이 개방되어 있었다. 그저 아름다운 자연의 한 가닥, 흙먼지가 휘날리는 황야 속의 휴식처, 부자들이 탐내고 있는 개발지…. 사람들은 그리 생각했다. 정작 그 산림을 이루는 빼곡한 나무와 식물 사이에 숨겨진 것은 담쟁이덩굴에 뒤덮여져 자연의 일부로 위장한 새하얀 건물이었다. 위성지도에서 지워진 그 건물의 정확한 명칭은 없었으나, 그곳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저 연구소라 명명(命名)했다.
그리고 그 연구소엔 특이한 연구원이 한 명 있었다. 가장 낮은 등급이자 모든 곳에서 열외로 취급되는 장의사. 하지만 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체불명의 존재. 그는 자신을 알다르라고 소개했다. 다른 연구원과 달리 지정된 구역이 없었다. 자유로운 바람 따라 다양한 연구실을 방문하며 실험체들과 대화를 나누고 가끔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전해주기도 했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존재했으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아무리 냉정하고 잔인한 사람이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말의 양심으로, 그런 알다르를 제지는 하였으나 이미 실험체의 손에 넘어가 버린 것을 빼앗지는 않았다. 오히려 알다르가 그러고 가면 협조적으로 구는 실험체도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양날의 검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 양날의 검은 끝내 ■■■를 겨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고인 액체가 질퍽거리며 죽음의 냄새를 풍겨왔다. 평소와 같이 가벼운 차림으로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으나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피투성이였다는 것이다. 바닥에 고인 그 액체와 같이 붉고 선명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복도의 전등은 스파크를 터트리며 때아닌 불꽃놀이를 하며 불안한 소리를 내었고 끊어진 전선과 부서진 벽이 차갑게 굳은 시체와 뒤엉켜 길을 막고 있었다. 알다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시체를 밟고 나아간다. 죽음으로 그늘진 수라도(修羅道)는 그의 생과 닮아있었다. 그는 장님이었기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밤이라고 생각한다. 몇 주 전 그 아이가 말한 계획은 밤을 가정한 것이었으니.
강제적으로 잡아먹힌 고요 속에서, 이 피비린내 나는 침묵을 만들어낸 이가 그에게 서서히 다가온다. 장님으로 살아가며 크게 불만은 없었으나, 이러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상대방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은 참 아쉬웠다. 알다르는 평소처럼 실없이 웃으며 그에게 성큼 다가갔다. 자신을 향한 살의와 투지는 꺾여있다. 속임수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기억 속 이 아이는… 클로버라고 불리는 이 실험체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알다르는 제 출입증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
"자, 이거. 선물 같은 거야. 떠돌이 생활은 잘할 자신 있지? 아마 넌 잘할 거야."
"……알다르 씨가 곤란해질 겁니다."
보라. 그의 안목은 정확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것인지…. 그는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더 이상 피를 보지 않고 안전하게, 무사히 밖으로 나갈 수 있음에도 망설인다. 그의 주변을 서성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였으나 확실한 것은, 알다르는 그런 클로버를 보며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일찍 결혼했으면 그만한 자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꽤 몹쓸 짓을 했었구나, 싶어진다. 과거의 그는 그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고,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어 다니는 시체와 다름이 없었다.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언젠가 자신을 죽이러 올 제 실험체들을 기다리며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이곳에서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오늘로 끝난다.
…끝났어야 했다.
정신을 차리면 그의 손을 잡고 함께 뛰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연구소를 벗어나 연구소를 감싸고 있던 숲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잡아먹히듯 두 사람이 사라진다. 거짓말이 아니고, 정말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폐에 가득 차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점차 호흡이 짧아져선 곧 죽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알다르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힘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 없었다. 정확히는 놓지 않은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데리고 나온 것일까. 연민 혹은 그와 비슷한 감정인가 보다 편한 삶을 위한 수단인가.
숲의 끝이 보였다. 어둠의 경계를 넘어갔을 때,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연구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그제야 알다르는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며 나무에 기댔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울렁거리는 속을 게워내는 대신 삼켜낸다. 아까까지만 해도 물어보려고 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이젠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안도했기 때문이다. 크게 심호흡하며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본다. 본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알다르였다. "국도 내리막 쪽으로 20분 정도 걸어가면 내 집이 나와. 일단 거기로 가자."라며 손을 뻗는다.
국도를 걸어가는 두 개의 그림자는 이어져 있다. 문득, 알다르는 왜 자신이 안도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지워진다. 하나는 익숙해도 둘은 익숙지 않았다. 곧 떠날지도 모르는 이라도 자신이 초대한 손님이니 떠나기 전까진 대접하는 것이 도리였다. 운이 안 좋으면 반나절도 안되어 모든 것을 들킬지도 모르고. 맞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찌 됐든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이니,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 또한 우리가 해야 할 것이었다.